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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ine] 노크 시스템

우리는 그날 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새벽 2시의 적막 속에서 스마트폰이 진동한다. 카드사에서 날아온 결제 승인 문자다. 30만 원, 혹은 50만 원. 결제 내역에는 'OOO 작가 되기 마스터 클래스' 혹은 '전자책으로 월 천만 원 벌기', '누구나 할 수 있는 브랜딩 글쓰기' 같은 화려하고 자극적인 타이틀이 찍혀 있다. 그 순간 당신의 뇌는 도파민을 뿜어낸다. 마치 이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 같은 착각, 당장이라도 통장에 인세가 꽂힐 것 같은 달콤한 환상에 취한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당신은 생각한다. '이제 내 인생은 달라질 거야. 이 강의만 들으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어.' 그날 밤, 당신은 평소보다 조금 더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주는 안온함 속에서.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다음 날 아침이 밝고, 현실의 출근 전쟁이 시작되면 어젯밤의 결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강의를 듣는 대신 넷플릭스를 켠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 내일부터 듣자.'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지난다. 당신은 강의를 1강의 오리엔테이션까지만 듣거나, 심지어는 로그인조차 하지 않은 채 방치한다. 환불 기간이 지나면 그 강의는 당신의 디지털 서재 구석, '나중에 볼 것'이라는 이름의 폴더에 처박혀 영원히 잊힌다. 현대인에게 온라인 강의 결제는 학습이 아니다. 그것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비싼 쇼핑이자, '나는 무언가 노력하고 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가장 게으른 면죄부다. 우리는 지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산다. 그리고 그 가능성만을 품에 안은 채 안도하며 잠든다. 이것이 바로 '지적 허영심'이 빚어낸 현대판 비극이다.

통계는 잔인할 정도로 정직하다. 온라인 강의 플랫폼들의 내부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온라인 강의의 평균 완강률은 5퍼센트를 넘지 못한다. 100명이 결제하면 끝까지 듣는 사람은 5명도 안 된다는 이야기다. 나머지 95명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자신의 의지박약을 탓하며 조용히 사라졌다. "내가 그렇지 뭐", "역시 나는 끈기가 없어"라며 자책하고, 다음 달에 또 다른 '인생 역전' 강의를 결제한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히 당신의 탓이 아니다. 이것은 구조의 문제다. 온라인 교육은 태생적으로 '고립'을 전제한다. 강사는 화면 속에서 혼자 떠들고, 당신은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거나,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졸고 있다. 당신을 감시하는 눈도 없고, 함께 달리는 페이스 메이커도 없다. 옆에서 "이거 같이 해봐요"라고 말을 걸어주는 동료도 없다. 유튜브 알림이 울리면 시선은 분산되고, 카카오톡 메시지가 오면 강의는 멈춘다. '내일 듣지 뭐'라는 타협은 너무나 달콤하고 손쉽다. 지식은 뇌로 전달될지 몰라도, 실행은 손끝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이것이 비대면 교육의 한계이자 비극이다. 강의를 듣는 행위는 수동적이다. 그것은 TV를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근육은 덤벨을 들어 올릴 때 생기는 것이지, 보디빌딩 영상을 볼 때 생기는 것이 아니다.

고독사 직전의 원고들을 위하여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고독한 작업이다. 작가는 스스로를 유배 보내는 자다.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침잠하여, 건져 올린 언어들을 종이 위에 배열하는 작업. 그것은 철저히 혼자만의 투쟁이다. 그러나 책을 만드는 과정까지 고독해야 할 필요는 없다. 아니, 고독해서는 안 된다. 글을 쓰는 것과 책을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전자가 예술의 영역이라면, 후자는 공학의 영역이다. 수많은 예비 작가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무너진다. 그들은 밤새워 글을 쓴다. 영혼을 갈아 넣어 원고를 완성한다. 그리고 이제 이것을 책으로 만들어보겠다고 결심한다.

그때부터 지옥문이 열린다. 아래아 한글이나 워드 프로세서의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편집이라는 낯선 정글에 발을 들이는 순간이다. 인디자인(InDesign)이라는 전문 툴은 마치 항공기 조종석처럼 복잡한 버튼들로 가득 차 있다. 여백을 설정하려다 페이지가 뒤틀리고, 폰트를 바꿨더니 자간이 깨진다. 맞춤법 검사기는 끝없이 빨간 줄을 그으며 당신의 문장을 난도질하고, 표지 디자인을 해보겠다고 무료 이미지 사이트를 뒤적거려 보지만, 결과물은 조잡하기 그지없다. 유튜브 강의를 찾아보지만, 강사의 마우스는 너무 빠르고 내 손은 너무 느리다. 하나를 해결하면 두 개의 문제가 터진다. 막히는 부분이 생겼을 때 물어볼 사람이 없다. 검색창을 뒤지다 지쳐버린다. 모니터 속의 커서는 깜빡이며 그들을 조롱한다. "넌 안 돼. 넌 여기까지야. 네가 무슨 작가야."

혼자라는 사실은 공포를 증폭시킨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예비 작가는 막막함에 압도된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지, 이 문장이 과연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이런 글을 누가 읽겠어?", "책 냈다가 망신만 당하는 거 아냐?" 그 의심은 결국 자기검열이 되고, 자기검열은 포기로 이어진다. 그렇게 작가의 꿈은 조용히 접힌다. 하드디스크 속에는 그렇게 주인을 잃고 고독사한 원고들이 수만 페이지 쌓여 있다. 폴더명 '내 책(언젠가)', 파일명 '최종_진짜최종.hwp'. 그 원고들은 세상의 빛을 볼 자격이 충분했으나, 단지 주인이 혼자였다는 이유만으로, 기술적인 장벽을 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디지털 무덤에 매장당했다. 우리는 이 비극을 멈춰야 한다. 온라인의 편리함 뒤에 숨어 고립을 자처하는 것은 작가에게 독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강의가 아니다. 더 많은 팁이나 노하우가 아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현장'이다. 당신의 멱살을 잡고 결승선까지 끌고 가줄 물리적인 강제력이다. 모니터를 부수고 나와야 한다.

강남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집행

그래서 우리는 만난다. 매주. 서울 강남의 한 카페. 이곳은 강의실이 아니다. 칠판에 필기하고 받아적는 수동적인 교실이 아니다. 이곳은 작업실이자 공장이며, 치열한 작전 지역이다. 우리는 이곳에 우아하게 커피나 마시러 모이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글 쓰느라 힘드시죠"라며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위로의 모임도 아니다. 그곳에 모이는 이유는 단 하나, '출판'이라는 행위를 집행(Execution)하기 위해서다. 사형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듯, 당신의 지긋지긋한 '작가 지망생' 신분을 그날 그 자리에서 영원히 처형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 것이다.

오프라인의 공기는 다르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것은 군중의 소란함이 아니다. 소수 정예만이 공유하는 묵직한 긴장감과 반가움이다. 고작 다섯 명 남짓. 넓은 공간을 채우기엔 턱없이 적은 숫자 같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오히려 공간을 꽉 채우고도 남는다. 저마다 노트북을 펴고 앉아 무언가에 몰입하고 있는 풍경. 타다닥거리는 키보드 소리가 비트처럼 공간을 채우고, 마우스 클릭 소리가 리듬을 만든다. 그들의 눈빛은 모니터를 뚫을 듯 강렬하다. 그 밀도 높은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나만 멍하니 있을 수 없다는 그 건강한 수치심, 혹은 긍정적인 압박감(Peer Pressure). 그것이 당신을 움직이게 한다. 당신의 게으른 뇌를 강제로 깨운다. 집에서는 한 달이 걸려도 못 했던 목차 정리가 그곳에서는 한 시간 만에도 끝난다. 며칠을 고민하며 미루고 미뤘던 표지 디자인이 옆에 앉은 작가님의 "이게 더 예뻐요"라는 한마디에 10분 만에 결정된다. 이것이 현장의 마법이다. 혼자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속도. 모멘텀이다.

혼자 달리면 걷게 되지만, 함께 달리면 뛰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격언이 아니라 생존 본능이다.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영양 떼가 함께 달리는 이유는 생존하기 위해서다. 100권 클럽의 오프라인 현장에는 당신과 똑같은 고민, 똑같은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당신의 거울이다. 인디자인 오류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는 사람을 보며 동질감을 느끼고, "저도 그랬어요, 이렇게 하니까 되더라고요"라며 도움을 주고받는다. 마침내 출판 버튼을 누르고 뿌듯해 하는 인원을 보며, 당신은 질투가 아닌 가능성을 본다. "저 사람도 해냈는데 나라고 못 할까? 나도 할 수 있다." 이 생각은 어떤 동기부여 명언보다 강력하다. 그것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경험을 팝니다

진정한 교육은 무엇인가. 지식을 주입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낡은 방식이다. 구글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 정보, 유튜브에 널리고 널린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더 이상 교육이 아니다. AI가 인간보다 더 많은 지식을, 더 정확하게 알고 있는 시대에 단순한 정보 전달은 무의미하다. 진짜 교육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A의 상태에 있던 사람을 B의 상태로 이동시키는 것. 원고만 가진 사람을 책을 가진 사람으로, 망설이는 사람을 실행하는 사람으로, 소비자를 생산자로 바꾸는 것. 그것이 교육의 본질이다. 100권 클럽은 지식을 팔지 않는다. 우리는 경험을 한다. 내 이름이 박힌 책이 세상에 나오는 경험,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해내는 성취의 경험,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의 경험.

당신이 강남의 그 문을 나서 집에 돌아갈 때, 당신의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을까. 강의 노트? 기념품? 아니다. 그런 시시한 것들이 아니다. 당신의 책이 담긴 URL 링크가 들려 있을 것이다. 전 세계 어디서든 구매할 수 있는, ISBN이 발급된 진짜 책이다. 당신은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그 링크를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 단톡방에 전송할 것이다. "나 책 냈어." 그 짧은 메시지를 보낼 때의 전율. 어떤 이야기를 할까 하는 콩닥거리는 심장. 묘하게 손끝마저 짜릿해지는 그 감각. 우리는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서로 가감 없이 지원해 준다. 44만 원, 혹은 그 이상의 비용을 지불하고 당신이 얻어가는 것은 그 어떤 명품보다 값진 '작가'라는 타이틀이다. 샤넬 백은 낡아지지만, 작가라는 타이틀은 영원히 당신의 이름 앞에 남는다. 그것은 당신의 자존감을 지탱하는 기둥이 될 것이다.

핑계는 끝났다

지금 당신의 모니터 앞을 보라.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책상 위에는 읽다 만 책들이 쌓여 있지는 않은가. 결제만 해두고 아이디와 비밀번호조차 까먹은 강의 목록들이 즐비할 수도 있다. 그것들이 당신의 인생을 바꿨는가? 조금이라도 변화시켰는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그저 당신의 불안을 잠시 마취시켰을 뿐이다. 마취가 풀리면 고통은 더 크게 찾아온다. "나는 왜 이럴까"라는 자괴감만 더 깊어질 뿐이다. 이제 마취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더 이상 모니터 뒤에 숨지 마라. "준비가 덜 됐어요", "아직 글이 부족해요", "다음에 할게요"라는 말은 비겁한 핑계다. 준비는 영원히 완벽할 수 없고, 부족함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완벽한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일단 저지르고 수습하는 것이 창조의 원리다. 미숙하면 미숙한 대로, 투박하면 투박한 대로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 다음이 있다.

현장으로 나오라. 당신의 덜 익은 원고를 들고, 당신의 낡고 투박한 노트북을 들고 우리에게 오라. 우리는 당신의 부족함을 비웃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부족함이 책이 되는 과정을 응원하고 도울 것이다. 당신이 넘어지면 일으켜 세울 것이고, 당신이 멈추면 등을 밀어줄 것이다. 100권 클럽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하지만 그 문을 통과하여 들어오는 것은 오직 당신의 몫이다. 사이트가 문 닫으면 들어가지도 못하는 온라인의 가벼움 대신, 직접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오프라인의 무거움을 선택하라. 그 무게감이 당신의 삶을 지탱하는 닻이 되어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하루일지 모르지만, 당신에게는 독립기념일이 될 것이다. 지루한 일상으로부터의 독립, 무기력한 자아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지망생'이라는 꼬리표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그 역사적인 현장에 당신의 자리를 비워두었다. 와서 채워라. 그리고 증명하라. 당신이 단지 꿈꾸는 몽상가가 아니라, 꿈을 현실로 만드는 혁명가임을. 우리가 돕겠다. 아니, 우리가 함께하겠다. 당신의 인생을 바꿀 3시간, 그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그대는 박수만 칠 관객이 아닙니다.
무대 위로 올라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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